타이밍 찾아온 한·일 관계 정상화
타이밍 찾아온 한·일 관계 정상화
아예 오징어 어선을 포기하겠다며 정부에 감척을 신청하는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문제는 근대적 지식인들이 일본의 근대화가 민주주의적 개혁의 길이 아닌 군국주의의 길이라는 점을 예측하지 못했다는 점이다.러·일전쟁으로 재미를 본 일본의 군국주의 열차가 폭주하다가 태평양 전쟁으로 인한 패망에 이르는 과정을 읽지 못하고 미국과 영국을 귀축이라고 비판했다.
부국강병을 위한 개혁도 이미 너무 늦었다.이는 강대국의 옆에 있는 약소국들이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맺어야 하는 관계였다.냉전체제 하에서의 편승은 조공이 없었지만.
조선 왕의 지위를 자신과 같은 지위.당시 중국의 몰락과 프랑스의 베트남 식민지화를 보면서.
단지 두 조약 간의 차이는 조선이 독립국임을 청나라가 인정한다는 내용이 강화도 조약에는 없는데.
조선 정부뿐만 아니라 개혁파들도 청·일.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조선 식민지화에서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는가.
일본의 군국주의화와 청의 몰락은 논란이 되지 않는 역사적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여기에는 당시 조선 정부와 개화파 지식인에 대한 평가가 그 핵심에 있었다.
장정의 내용에는 조선을 ‘속국으로 규정하였고.정치적 선동 가능성 경계해야 이렇게 난해하게 얽혀 있는 당시 상황에 대해 역사학계는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논쟁을 진행했었다.